원장 컬럼의대는 닥치고 외우는 겁니다 — 그리…
AI

의대는 닥치고 외우는 겁니다 — 그리고 지금, AI 때문에 혼란합니다

연세편한재활의학과의원 · 홍진오 원장  | 

안녕하세요. 통증과 대화하는 의사,

별내 연세편한재활의학과 홍진오 원장입니다.

별내에서 진료하다 보면 학부모님들께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원장님, 의대 가려면 무슨 특별한 암기법이 있나요?" 뭔가 대단한 비법을 기대하시는 눈치인데, 정직하게 답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의대는 닥치고 외우는 겁니다. 요령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 요령들은 외워야 할 절대량을 줄여주지 못합니다. 조금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뿐이에요. 오늘은 그 이야기, 그리고 요즘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을 함께 적어보려 합니다.

"의대생들은 머리가 좋아서 그 많은 걸 외우나요?"

"효율적인 암기법이 따로 있나요?"

"이제 AI가 다 알려주는데 그렇게 외울 필요가 있을까요?"

PART 1

먼저 양이 상식을 벗어납니다

해부학 하나만 예로 들겠습니다. 사람 몸의 뼈, 근육, 신경, 혈관에는 각각 이름이 있습니다. 근육 하나를 안다는 건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어디서 시작해 어디에 붙고, 어떤 신경의 지배를 받고, 수축하면 어떤 움직임이 나오는지를 함께 안다는 뜻이에요. 그런 항목이 수백 개입니다. 그리고 해부학은 본과 1학년 1학기 과목 하나일 뿐입니다.

그 뒤로 생리학, 생화학, 약리학, 미생물학, 병리학이 줄줄이 옵니다. 약리학에서는 약 이름과 작용, 부작용, 금기를 외우고, 미생물학에서는 균 이름과 특징을 외웁니다. 이해로 커버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신경 하나가 왜 하필 그 근육을 지배하는지에는 논리적 이유가 없어요. 그냥 그렇게 생긴 겁니다. 유도할 수 없으면 남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대생은 머리가 좋다"는 말에 늘 조금 민망해집니다. 제가 본 풍경은 머리로 버티는 사람들이 아니라 엉덩이로 버티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새벽 두 시 도서관에 남아 있는 사람이 결국 시험을 넘깁니다.

PART 2

그래도 방법은 있었습니다

양을 줄이지는 못해도, 같은 시간에 더 남기는 방법은 있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썼던 것들입니다.

1. 읽지 말고 백지에 꺼낸다

가장 확실했던 하나입니다. 책을 다시 읽으면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눈에 익은 걸 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백지를 펴고 아무것도 안 보고 써 보면 내가 뭘 모르는지가 3분 만에 드러납니다. 밑줄 긋기와 형광펜은 마음만 편해질 뿐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2. 한 번에 몰지 말고 간격을 둔다

같은 열 시간이라도 하루에 몰아넣은 열 시간과 닷새에 나눈 열 시간의 결과가 달랐습니다. 벼락치기는 시험장까지는 데려다주지만 시험장을 나오는 순간 증발합니다. 문제는 의사에게 필요한 건 시험 다음 날에도 남아 있는 지식이라는 점이에요.

3. 해부는 그려야 남는다

해부학은 읽어서는 안 외워집니다. 백지에 직접 그려보면 위치 관계가 손에 남습니다. 못 그려도 상관없어요. 그리는 동안 "이 신경이 이 근육 밑으로 지나가나 위로 지나가나"를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데, 그 결정의 순간이 기억을 만듭니다.

4. 동기에게 소리 내어 설명한다

속으로 아는 것과 입 밖으로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설명하다 말이 막히는 지점이 정확히 내가 모르는 지점이에요. 의대에서 스터디를 짜는 진짜 이유가 이겁니다. 서로에게 설명하려고요.

5. 이유가 있는 건 이유로 묶는다

외울 것 중에도 기전으로 설명되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건 이유로 묶으면 훨씬 오래갑니다. 다만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그렇게 묶이는 건 전체의 일부이고, 나머지는 결국 반복으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6. 순서는 두문자로 압축한다

순서가 중요한 항목은 첫 글자만 따서 외웁니다.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들이 있어요.

실제로 쓰는 두문자 두 가지

후 시 동 활 삼 외 안 청 설 미 부 설

뇌신경 12쌍의 순서 — 후각·시각·동안·활차·삼차·외전·안면·청(내이)·설인·미주·부·설하. 20년이 지나도 이 열두 글자는 안 잊힙니다.

주 월 삼 두 · 대 소 유 유

손목뼈 8개 — 주상골·월상골·삼각골·두상골 / 대능형골·소능형골·유두골·유구골. 손목 통증 환자를 볼 때마다 지금도 머릿속에서 이 순서가 돌아갑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요령이라기보다 노동의 형태를 바꾼 것에 가깝습니다. 어느 것도 "안 외우고 넘어가는 법"은 아니에요.

PART 3

공대 간 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공부였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다 서울대 전기공학부로 간 친구가 있습니다. 훗날 IT 기업을 세운 최병근이라는 친구인데, 한참 뒤에 서로 어떻게 공부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부'라는 단어를 쓰면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더군요.

공대의 공부

원리 몇 개를 깊이 이해한다

모르는 문제는 유도해서 만들어낸다

외운 양보다 풀어내는 힘이 자산

시험지에서 처음 보는 문제를 만난다

의대의 공부

사실을 방대하게 축적한다

모르는 건 유도할 방법이 없다

아는 양이 곧 판단의 재료

시험지에서 아는 것만 나온다(대신 전부 나온다)

그 친구는 공식 몇 개를 손에 쥐고 처음 보는 문제로 걸어 들어갑니다. 저는 그게 정말 부러웠어요. 반대로 제 쪽은 유도라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환자 앞에서 "잠깐만요, 지금부터 유도해 보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공부냐를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다루는 지식의 성질이 다른 것뿐이에요. 세상의 규칙을 다루는 학문은 이해가 무기가 되고, 사람의 몸이라는 '이미 만들어진 사실'을 다루는 학문은 축적이 무기가 됩니다. 아이가 어느 쪽에 맞는지를 보는 게, 어느 대학에 보낼지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PART 4

솔직히, 다시 돌아가면 못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은 꼭 쓰고 싶었습니다.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 무용담처럼 들리는데, 제 진심은 정반대예요. 지금의 저를 그때로 돌려보내면 아마 못 버틸 겁니다.

그때는 어려서 가능했던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흘을 거의 안 자고도 다음 날 시험장에 앉을 수 있는 회복력, 하루 열네 시간을 앉아 있어도 허리가 버텨주던 몸. 지금은 세 시간만 앉아 있어도 목이 뻐근합니다.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고 나니 더 잘 압니다. 그때 제가 쓴 건 머리가 아니라 몸이었어요. 젊음을 연료로 태운 셈입니다.

그래서 요즘 수험생 부모님들께는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공부량을 늘리는 것보다 잠과 자세를 지키는 게 결국 더 남는 장사라고요. 밤을 새워 외운 것은 다음 날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반면 충분히 자고 외운 것은 남습니다. 그리고 목과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공부의 질이 아니라 버티는 시간의 문제가 되어버려요.

PART 5

그리고 지금 — AI 때문에 혼란합니다

여기서부터가 요즘 제 솔직한 고민입니다. 얼마 전 진료실에서 무심코 궁금한 걸 AI에게 물어봤는데, 제가 6년을 들여 머리에 넣은 내용을 3초 만에, 저보다 정연하게 정리해서 내놓더군요. 잠깐 멍했습니다. 그러면 그 6년은 대체 뭐였나 싶어서요.

이 질문에 대한 근사한 답을 갖고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진료를 하면서 어렴풋이 느끼는 게 하나 있어요. 환자를 볼 때 저를 움직이는 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이상하다는 감각'이라는 겁니다.

허리가 아프다고 오셨는데, 설명이 어딘가 안 맞습니다. 왜 안 맞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걸립니다.

그 걸리는 느낌 때문에 한 가지를 더 물어보고, 한 군데를 더 만져봅니다.

그제서야 단순한 근육통이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이 섭니다.

중요한 건 AI에게 물어보려면 먼저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상하다는 감각에서 나오고, 그 감각은 결국 축적에서 나옵니다. 머릿속에 재료가 없으면 애초에 걸리는 게 없어요. 검색창 앞에서 무엇을 검색할지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제 잠정적인 결론은 이렇습니다. 외운 내용 자체는 AI가 대신할 수 있지만, 외우는 동안 만들어진 그물망은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잠정입니다. 제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요. 솔직히 저는 아직 혼란합니다. 다만 그 혼란을 감춘 채 아이들에게 "그러니까 무조건 외워라"라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외운 것은 AI가 대신할 수 있어도,

외우는 동안 생긴 감각은 대신하지 못합니다.

— 아직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첫째, 이 글은 의대 진학을 권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는 제 길을 후회하지 않지만, 이 길이 모두에게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축적형 공부가 잘 맞는 아이가 있고, 유도형 공부가 잘 맞는 아이가 있습니다. 후자인 아이를 의대에 밀어 넣으면 6년 내내 힘듭니다. 둘째, 암기법이 재능이나 시간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위에 적은 방법들은 같은 시간에 더 남기는 요령일 뿐, 절대량을 줄여주지 않아요. 그렇게 광고하는 것이 있다면 저는 믿지 않겠습니다. 셋째, AI를 멀리하자는 이야기도 전혀 아닙니다. 저도 매일 씁니다. 다만 물어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은 여전히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소회이며, 학습법의 효과에는 개인차가 큽니다.

3줄 요약

의대 공부는 이해로 대체되지 않는 암기의 총량이 본질입니다. 신경이 왜 그 근육을 지배하는지에는 이유가 없어서 유도할 수가 없고, 결국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버팁니다.

그래도 방법은 있습니다 — 다시 읽지 말고 백지에 꺼내기, 몰아치기 대신 간격 두기, 해부는 직접 그리기, 소리 내어 설명하기, 이유 있는 건 이유로 묶기, 순서는 두문자로(후시동활삼외안청설미부설). 다만 이것들은 절대량을 줄여주지 않습니다.

공대의 공부가 유도해내는 힘이라면 의대의 공부는 축적입니다. 어느 쪽이 우월한 게 아니라 지식의 성질이 다른 것이고, 아이가 어느 쪽에 맞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AI 시대에 그 축적이 무슨 의미인지는 — 저도 아직 혼란합니다.

정리하자면, 의대는 요령의 학문이 아니라 축적의 학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6년을 젊음을 태워 통과했고, 지금 돌아가면 못 할 것 같다고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것을 3초 만에 답하는 도구 앞에서 요즘 자주 멈칫합니다. 그럼에도 진료실에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그 감각이 어디서 왔는지는 어렴풋이 압니다. 그 자리에 서 보려고 새벽까지 앉아 있던 시간들이겠지요.

공부하는 자녀를 두신 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요. 잠과 자세를 지켜주세요. 밤을 새워 넣은 것은 대부분 새벽에 새어 나가고, 목과 허리가 무너지면 그때부터는 공부가 아니라 버티기가 됩니다. 저는 오늘도 여러분의 통증 곁을 지키겠습니다.

수험생 자녀분이 목·어깨·허리 통증으로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하신다면 편하게 상담 오세요. 자세와 책상 환경을 함께 점검하고, 공부 시간을 지켜낼 수 있는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평일 야간진료(화·목)와 주말 진료도 하고 있어 학생들이 오기에도 부담이 적습니다.

문의는 카카오톡 채널이나 전화(031-523-8988)로 주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연세편한재활의학과 홍진오 원장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별내재활의학과 #연세편한재활의학과 #홍진오원장 #통증과대화하는의사 #의대공부법 #의대암기법 #암기법 #연세대의대 #본과1학년 #해부학 #뇌신경12쌍 #두문자암기 #인출연습 #백지복습 #분산학습 #스터디 #공대vs의대 #진로선택 #수험생 #학습법 #AI시대공부 #수면과기억 #공부자세 #교육칼럼 #별내통증클리닉 #남양주재활의학과 #다산신도시병원 #별내야간진료 #주말진료병원

※ 본 글은 필자 개인의 학습 경험과 소회를 담은 교육 칼럼이며, 특정 학습법의 효과를 보증하거나 특정 대학·학과 진학을 권유하지 않습니다. 학습 방법의 효과는 개인의 성향과 과목 특성에 따라 차이가 크므로 참고 자료로만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언급된 인물의 이력은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 사실에 근거해 기술하였습니다. 또한 본 글은 의학적 진단·치료에 대한 안내가 아니며, 통증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전문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