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컬럼"피 한 방울로 다 된다면서요?" —…
바이오

"피 한 방울로 다 된다면서요?" — 제가 틀렸던 이야기

연세편한재활의학과의원 · 홍진오 원장  | 

안녕하세요. 통증과 대화하는 의사,

별내 연세편한재활의학과 홍진오 원장입니다.

오늘은 제가 틀렸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의사가 자기 판단이 틀렸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는 이 경험에서 배운 게 꽤 많아서요.

며칠 전 진료실에서

혈액검사 결과지를 함께 보고 있는데, 환자분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원장님, 요즘은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다면서요? 왜 이렇게 여러 통을 뽑아요?"

저는 반사적으로 "아, 그건 좀 다른 이야기예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자꾸 그 질문이 걸렸어요. 제 대답이 몇 년 전 기준이었다는 걸 알았거든요.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다면서요?"

"암도 피검사로 안다던데요?"

"그럼 왜 조직검사를 해요?"

하나. 제가 배운 것은 "손끝 피는 다르다"였습니다

수련받던 시절, 검체 하나 때문에 혼난 기억이 있습니다. 급하게 받아 온 혈액이 용혈돼 있었어요. 채혈 과정에서 적혈구가 깨진 겁니다. 선생님은 결과지를 보지도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못 써. 다시 받아 와."

그때는 잔소리처럼 들렸는데, 이유를 알고 나니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 세포가 깨지면 세포 안에 많던 칼륨이 새어 나와 실제보다 높게 나옵니다. 그 숫자를 믿고 약을 조절하면 환자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채혈을 정맥에서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손끝을 찔러 짜내면 조직액이 섞이고 세포가 터집니다. 게다가 검사마다 필요한 양이 있어서, 적은 양을 여러 검사에 나누려고 희석하면 미량 물질은 검출 한계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 지식이 제 안에 "피 한 방울로는 안 된다"는 문장으로 굳어 있었습니다.

둘. 그래서 그 뉴스를 봤을 때 — "역시" 했습니다

몇 년 전 테라노스라는 미국 회사 이야기가 크게 났습니다. "손끝 피 한 방울로 200가지가 넘는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했고, 기업가치가 어마어마하게 평가받았다가, 결국 기술이 약속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 창업자가 투자자 사기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입니다.

그 뉴스를 봤을 때 제 반응은 솔직히 "역시 그럴 줄 알았다"였습니다. 의료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문장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들렸거든요. 저는 조금 우쭐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안 속았다고요.

그 사건에서 제가 가장 이상하게 여긴 건 기술이 아니라 사람 구성이었습니다. 이사회에 명망 있는 정치인과 군인은 있었는데, "그 값이 정말 재현되나요?"라고 물을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의료 기업의 의사결정 자리에 의료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 지금 보면 그것부터가 신호였습니다.

셋. 그런데 몇 년 뒤, 제가 놀랐습니다

학회에서 액체생검(liquid biopsy) 이야기를 처음 제대로 들었을 때의 기분을 기억합니다. 종양이 혈액 속으로 흘려보낸 DNA 조각을 잡아내, 그 유전자를 읽어 치료제를 고른다는 겁니다.

1. 혈액으로 암의 유전자를 봅니다

폐암처럼 조직을 떼어내기 어려운 위치일 때, 혈액으로 변이를 확인해 맞는 표적치료제를 고릅니다. 국내에서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2. 면역항암제 치료 중에도 씁니다

치료를 하면서 혈액 속 종양 DNA가 줄어드는지를 봅니다. 영상 검사보다 먼저 재발의 신호가 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수술 후 "다 없어졌는지"도 확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잔존 여부를 혈액으로 가늠해 항암치료를 더 할지 말지 판단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피로 암을 본다"는 것은 이제 공상이 아닙니다. 제가 "안 된다"고 굳혀 두었던 문장이,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뚫린 겁니다. 그때 좀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정확히는 "제가 아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였을 뿐이었으니까요.

덧붙이자면 한 방울로 하는 검사는 원래도 있었습니다. 당뇨 환자분들이 매일 하시는 혈당 자가측정이 그렇고, 태어난 아기의 발뒤꿈치에서 몇 방울 받아 하는 선별검사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걸 알면서도 "한 방울"이라는 말에만 반응했던 거죠.

넷. 그럼 무엇이 달랐던 걸까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사건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테라노스가 틀린 것은 "가능하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주장

손끝 한 방울로

200가지 이상 전부

검증 자료는 영업비밀이라 비공개

한계에 대한 설명 없음

지금의 액체생검

정맥에서 튜브 여러 개 분량

특정 유전자·특정 목적에 한정

조직검사와의 일치도를 논문·허가로 입증

못 잡는 경우를 명시

재미있는 건 이겁니다. 종양 DNA는 혈액에 워낙 미량이라, 오히려 '더 많은 피'가 필요합니다. 희석하면 안 되니까요. 의학이 간 길은 "적은 피로"가 아니라 "덜 아프게, 대신 충분한 양으로, 목적을 좁혀서"였습니다.

그러니 그 회사가 틀린 지점은 하나로 좁혀집니다. "이미 검증됐다"고 말한 것. 지금의 검사들은 그들이 건너뛴 바로 그 절차—공개하고, 기존 검사와 나란히 비교하고, 허가를 받는 과정—을 통과해서 왔습니다. 그 차이가 20년을 갈랐습니다.

다섯. 그래서 환자분께 드린 대답

며칠 뒤 그분이 다시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드린 대답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요즘은 피로 암의 유전자를 확인하는 검사도 실제로 씁니다. 제가 배울 때는 안 된다고 했던 것들이에요."

"다만 그건 '무엇을 볼지 정해놓고 하는 검사'예요. 한 번에 다 보는 게 아니라, 목적에 맞는 항목만 봅니다. 그리고 그런 검사일수록 피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 통을 뽑은 건, 기술이 뒤처져서가 아니라 보려는 게 여러 가지여서입니다."

그분은 "아, 그렇구나"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이후로 "그건 안 됩니다"라고 단정하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제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은

사실 '제가 아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였습니다."

여섯. 제가 배운 것

1. 의심은 필요하지만, 배척은 다릅니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의심하는 건 의사의 의무입니다. 다만 "그건 원래 안 돼"로 굳어버리면 진짜 진보가 왔을 때 못 알아봅니다. 의심과 배척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2

판단의 기준은 결국 검증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이제 두 가지만 봅니다. "기존 방법과 비교한 자료가 있나", "어떤 환자들에게서 확인했나." 이 두 질문에 답이 있으면 새 기술이고, 없으면 아직 주장입니다.

3

그리고 이건 AI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요즘 의료에 AI가 빠르게 들어옵니다. 저도 관심 있게 보고 씁니다. 다만 물어야 할 것은 그대로예요. 어떤 데이터로 배웠나, 어떤 환자군에서 검증했나, 틀렸을 때 누가 책임지나. 기술이 바뀌어도 질문은 바뀌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세 가지만 덧붙입니다. 첫째, 저는 종양내과 의사가 아닙니다. 액체생검을 직접 판독하고 치료를 결정하는 건 제 영역이 아니고, 이 글은 한 사람의 의사로서 배우고 놀랐던 경험을 적은 것입니다. 정확한 적용 여부는 담당 선생님과 상의하셔야 합니다. 둘째, 혈액검사가 조직검사를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닙니다. 종양이 DNA를 충분히 흘리지 않으면 혈액에서 안 나올 수 있고, 안 나왔다고 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조직검사가 여전히 기준입니다. 셋째, 그렇다고 "검사는 많을수록 좋다"는 뜻도 아닙니다. 증상도 이유도 없이 항목만 늘리면 진짜 병이 아닌데 비정상으로 나오는 결과가 생기고, 그때부터 불필요한 검사와 걱정이 시작됩니다. 검사는 의심되는 이유가 있을 때 그 이유에 맞춰 고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3줄 요약

저는 "피 한 방울로는 안 된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손끝 피는 조직액이 섞이고 세포가 깨져 값이 달라지며, 희석하면 미량 물질은 검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테라노스 사건 때 "역시" 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액체생검이 등장했습니다. 혈액 속 종양 DNA로 유전자를 읽어 표적치료제를 고르고, 치료 반응을 추적하고, 수술 후 잔존 여부를 확인합니다. 제가 "불가능"이라 굳혀둔 문장이 제가 생각 못 한 방향에서 뚫렸습니다.

다만 그 길은 "한 방울"이 아니라 "충분한 양의 정맥혈 + 목적을 좁힌 항목 + 검증"이었습니다. 테라노스가 틀린 건 "가능하다"가 아니라 "이미 검증됐다"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배운 것 — 의심은 하되 배척하지 말 것, 그리고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검증일 것.

정리하자면, 저는 옳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영원한 결론처럼 들고 있었습니다. 의학은 계속 움직이는데 제 문장은 멈춰 있었던 거죠. 환자분의 질문 하나가 그걸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진료실에서 "그건 안 됩니다"라는 말을 조금 아껴 쓰려고 합니다. 대신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고,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려고요.

의사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신뢰를 깎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이 훨씬 위험하더군요. 테라노스 사건이 저에게 남긴 진짜 교훈도 결국 그거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여러분의 통증 곁을 지키겠습니다.

건강검진이나 혈액검사 결과지를 받으셨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 불안하시다면 편하게 들고 오세요. 결과지를 함께 보며 지금 확인이 필요한 것과 지켜봐도 되는 것을 정리해 드리고, 제 영역이 아닌 부분은 맞는 진료과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평일 야간진료(화·목)와 주말 진료도 하고 있습니다.

문의는 카카오톡 채널이나 전화(031-523-8988)로 주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연세편한재활의학과 홍진오 원장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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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소회를 담은 칼럼이며, 개별 진단·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액체생검 등 검사의 적용 대상·시점·해석은 암종과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고 관련 지침도 계속 갱신되므로, 실제 적용 여부는 반드시 담당 전문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혈액 기반 검사가 조직검사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며, 결과가 음성이라도 질환을 배제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 언급된 사건의 경과와 처분 내용은 공개된 자료와 언론 보도에 근거한 것으로, 특정 기업이나 개인을 비방할 목적이 없습니다.